[고두현의 문화살롱] 영어 단어는 100만 개 넘는데 우리는?

입력 2023-10-03 17:49   수정 2023-10-04 00:38


미국 로스앤젤레스(LA)시가 오는 6일 ‘한글날’ 제정 선포식을 열고, 매년 10월 9일을 한글날로 기념하기로 했다. 5일에는 LA시티칼리지(LACC)가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 동상 제막식을 개최한다. 미국 대학에 세종대왕 동상이 세워지는 것은 처음이다. 이 학교 한국어 강좌 수강생은 1000명이 넘는다.

한국어 수강생은 최근 더 늘고 있다. 미국 남캘리포니아에만 80개 학교에 수강생이 9000명에 이른다. 미국 전역 170개 학교에 한국어반이 개설돼 있다. 주LA한국문화원은 한글날을 계기로 ‘미주 한국어 시낭송 대회’를 연다.
'~든'과 '~던', '~서'와 '~써' 오용
한글날을 맞아 국내에서도 4~10일 ‘2023 한글주간’이 이어진다. 한글문화산업전시회에서는 인공지능(AI), 챗봇, 교육·출판 등 36개 기업이 한글 산업 아이디어 공모전 수상작을 전시한다. 국립한글박물관은 ‘한글 글꼴패션쇼’ ‘한글 브레이킹댄스’, 국립국어원은 ‘2023 세계 한국어 한마당’을 연다. 세종학당재단은 전 세계 세종학당에서 선발된 우수 학습자 170여 명을 초청한다.

그러나 한글날이 지나면 이런 열기가 시들해지고 만다. 한글의 위상도 아직 미미하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실린 표제어 수는 60만 개를 넘는다. 2000년부터 펴내기 시작한 온라인사전은 3개월마다 어휘를 새로 등재한다. 미국 언어연구 기구인 글로벌 랭귀지 모니터(GLM)에 따르면 현재 사용 중인 영어 단수 수는 100만 개를 넘었다. 이 기구는 매일 14개 이상 단어가 영어에 새로이 포함되고 있다고 밝혔다.

이에 반해 한국의 표준국어대사전 표제어 수는 51만여 개에 불과하다. 그중에서도 우리 고유어는 25.5%인 13만 개밖에 안 된다. 개념어가 그만큼 부족하다는 얘기다. 예를 들어 hindsight(일이 다 벌어진 뒤 늦게야 깨달음), headstart(한발 앞선 출발, 남보다 일찍 시작해서 갖는 유리함) 같은 단어를 우리말 한 단어로 표현할 길이 없다. 한글의 역사가 짧다 보니 주요 개념어는 한자를 빌려다 쓴다. 프랑스어와 독일어가 개념어를 만들고 다듬은 역사는 눈물겹다.

국어를 잘못 쓰는 경우도 많다. “세계에서 가장 큰 수족관 중 하나” 등 ‘그른 말’을 무심코 쓴다. 세상에 ‘가장 큰 것’은 하나밖에 없다. ‘~것 중 하나’는 영어의 ‘가장 ~중 하나(one of the most~)’를 직역한 게 아닌가 싶다. 물론 스포츠 중계에서 최소한 두 팀의 여러 선수가 경기할 때, ‘최고의 학생(들)이 입학하는 명문대’처럼 각 학교를 대표할 때는 사용할 수 있다.

TV 자막에도 잘못된 표현이 많다. 대표적인 게 ‘~든’과 ‘~던’, ‘~서’와 ‘~써’다. ‘~든’은 ‘이것이든 저것이든’ 등 선택이나 조건을 나타낼 때, ‘~던’은 과거의 일을 가리킬 때 쓴다. ‘~서’는 ‘교사로서’처럼 지위·신분 등의 자격·주격, ‘~써’는 도구나 까닭을 나타내는 기구격으로 쓴다. 이를 거꾸로 쓸 때가 많다.
"파이팅" 대신 "빅토리" "앗싸"
SNS 글의 오류는 더 심하다. ‘뵈어요·봬요’를 ‘뵈요’로 쓴다든지 ‘그랬대’를 ‘그랬데’로 쓰는 일이 잦다. ‘(학생을) 가르치다’와 ‘(손으로) 가리키다’를 혼동하기도 한다. ‘다르다’(비교가 되는 두 대상이 서로 같지 않다)와 ‘틀리다’(셈이나 사실 따위가 그르게 되거나 어긋나다)를 구분하지 못하는 이가 많다.

살벌한 전투 용어까지 마구 쓴다. 국회 질문 중에도 섬뜩한 말이 중계된다. ‘학살’과 ‘암살자’가 난무한다. 저마다 ‘육아전쟁’ ‘입시전쟁’ ‘취업전쟁’ 등 자극적인 표현을 경쟁적으로 내뱉는다. ‘세금폭탄’ ‘매물폭탄’ ‘문자폭탄’도 마찬가지다. 비가 많이 내리면 ‘물폭탄’이고 눈이 많이 내리면 ‘눈폭탄’이니 이마저 전쟁 용어다.

결혼식장에서도 신랑에게 싸움을 부추긴다. “파이팅(fighting·싸움)!”을 외치는 친구들에게 신랑은 “고맙다”고 화답한다. 신혼여행을 떠나는 길에도 다시 한번 ‘잘 싸우라’는 독려가 이어진다. ‘파이팅’은 적대적 관계에 쓰는 부정 언어여서 정작 영어권에선 꺼린다. 꼭 쓰고 싶다면 차라리 “빅토리(victory·이기자)!”가 낫지 않은가. 우리말로 “아자아자!” “앗싸!” “으라차차!” “힘내자!”도 있다.
"셰익스피어가 살아있구나!"
한글 교육 또한 허술하다. 학교에서 제대로 가르치는 것만큼이나 사회 구성원의 노력이 필요하다. 영국 공영방송 BBC는 30년째 ‘카운트다운’이라는 영어 단어 게임쇼를 진행하고 있다. 이 게임은 모음과 자음을 추첨해서 단어를 만드는 것이다. 주부들이 저녁 요리를 준비하며 아이들과 함께 있는 오후 5시30분부터 30분간 진행한다.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는 프로그램이어서 아주 인기가 높다. 유학생들이 이를 보면서 “셰익스피어가 살아있구나!”라며 감탄할 정도라고 한다.

프랑스에서는 이보다 앞선 1965년부터 텔레비전에서 오리지널 버전인 ‘숫자와 문자(Des chifres et des lettres)’를 방영하고 있다. 미국과 독일 등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방송에서는 고작 ‘우리말 겨루기’ 정도의 단편적인 프로그램만 내보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 학생들의 문해력이 세계 최하위에 머물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가 2021년 발표한 국제학업평가에서 한국 청소년들은 문장 속의 ‘사실’과 ‘의견’을 구별하는 능력(25.6%)에서 꼴찌를 기록했다. 글자만 알지 문장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얘기다.

국제학술지 ‘아동 발달’에 따르면 자녀의 문해력은 부모의 독서와 언어 사용에 큰 영향을 받는다. 가정에서 책을 많이 읽어야 문해력이 높아진다는 말이다. 우리나라 성인 10명 중 4명이 1년에 책을 한 권도 안 읽는다. 그러니 EBS 문해력 측정에서 성인들의 평균 점수가 54점밖에 안 된다.

이래저래 가야 할 길이 멀다. 같은 아시아권 언어인 중국어나 일본어는 20년 전에 미국 고교 과목(AP)에 포함됐는데 한국어는 번번이 좌절됐다. 국내에서도 한글날 행사가 1년 내내 있는 게 아니니 걱정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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